근대축구의 태동기

근대축구의 태동기

유럽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수세기 전부터 다양한 구기를 즐겼다. 1840년부터 1860년까지, 영국에서 대대적인 변혁을 겪은 구기들은 사립중고등학교(Public school)와 대학교 내부에서 근대 축구로 탄생하게 되었다. 오늘날 축구는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사회계층이 즐기는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었다.

근대축구의 요람, 영국

중세와 근세 유럽의 민속사를 살펴보면 민중들 사이에서 행해지곤 하던 격력한 공놀이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 문서로 정리된 규칙 없이 전통에 따라 이루어진 이러한 공놀이에는 수많은 유형이 존재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기: 술(soule)

19세기까지 브르타뉴와 피카르디 지방에서 성행하던 이 경기는 공업화 이전에 농촌사회에서 행해지던 공동체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아직 명백히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이 경기가 카톨릭 교구와 관련된 종교적 성격을 지닌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경기에는 인접 마을의 젊은이들이나 같은 행정구의 젊은 기혼자들과 독신자들이 참여했다. 경기에 열중하는 귀족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앙리 2세가 롱사르를 경기에 끌어들일 정도였다. 양진영은 밀기울이나 건초를 채운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공인 술을 적진에 옮겨놓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조직이라고 할 것은 없었고, 기록으로 정리된 규칙조차 존재하지 않아 경기 진행은 오로지 전통에 따랐다. 참가자수, 경기시간, 경기장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모든 신체적 수단들을 동원하여 선수들은 술을 향해 돌진했고, 또한 그것을 적진에 옮겨다 놓기 위해 손과 발을 번갈아 사용하며 경기에 임했다. 선수들 간의 역할 구분이라 할 것은 전혀 없었고, 중요한 것은 힘과 정열뿐이었다. 중세의 전쟁처럼 엎치락뒤치락 밀고 밀리거나 뛰고 달리다 마침내 어느 한 팀이 일정한 장소에 술을 내려놓으면 경기는 끝이 났다. 당국이 금지령을 내리곤 했다는 사실은 이 놀이가 얼마만큼 격렬한 것이었는지 증언해 준다. 경기를 치르다가 잘못해서 절름발이가 되는 이들도 있었고 때로는 죽는 이들도 있었다.

공차기: 전세계적인 전통의 놀이

중세 영국에도 대중이 즐겨 하던 공놀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이렇게 소리친다 “너, 이 추잡한 공차는 놈(footballer)!” 영국 남서 지방의 한 주인 콘월에서는 헐링(hurling)이 행해졌다. 헐링은 상대편 골에 공을 내려놓기 위해 때로는 산으로 골짜기로 격렬한 달리기를 벌이고 때로는 강물을 건너기도 해야 하는 경기였다. 점차로 이런 유형의 놀이에도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전술이 도입되었고, 선수들간의 역할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각 팀의 양측면에는 혼전을 뚫고 나갈 주자들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공을 빼앗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 볼로냐와 피렌체에서는 공을 발로 모는 경기인 ‘퀴코 델 칼치오(quico del calcio)’가 행해졌다. 사육제의 마지막 날이나 부활절에 행해지던 칼치오는 뚜렷한 경계가 정해진 한정된 공간 내부에서 진행되는 한결 세련된 경기였다. 물론 칼치오 선수들은 손으로 공을 잡을 수 있었으나, 단순한 형태로나마 역할의 분배와 집단경기의 초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칼치오는 근대 축구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대륙에서도 구기를 즐겼다. 한국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이 그 예이다.

근대축구의 요람, 영국에서 여성들이 축구하는 모습

영국의 사립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사라져가던 경기를 선택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전통적 공동체들의 단결을 확고히 지탱해 주던 유대관계들이 점차 느슨해지면서 새로운 사회관계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새로운 관계들은 옛 구기를 포용하지 않았고 그 결과 구기는 전반적으로 쇠퇴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구기가 명맥을 유지했는데 이는 사립중고등학교(public school)에 다니던 유복한 계층의 학생들이 구기를 선호한 덕분이었다. 학생들은 나름대로의 체계를 지닌 여가활동으로 구기를 정비했다. 한편 학부모들은 이런 격렬한 경기가 지니는 교육적 가치를 인정했고, 상급생들은 사회적으로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던 교사들의 권위 부재를 이용하여 신입생들과 열등생들을 지배하기 위한 체벌수단으로 구기를 이용했다.

초기인 1830년경까지 구기는 그 최초의 특성을 사립중고등학교들 내부에서 보전했다. 일정한 형태가 없는 산만한 조직,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채 변화, 발전하던 규칙들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기 학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관례를 고수했다. 여전히 경기장 규격, 경기시간, 참가선수수에 관한 규칙들은 마련되지 않았다. 경기에서 맡아야 할 역할들은 정해져 있지 않았고 경기의 제한사항 또한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힘과 의욕이었다. 어찌 보면 공동체의 역할이란 개인의 개성과 특성을 감춰두는 데 있다.

구기들의 ‘스포츠화’

영국의 산업화에 영향을 받아 1830년부터, 사립 중고등학교들 내부에 다양한 변화가 잇달았는데 여기에는 구기 진행방식의 결정적인 변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정되어 있던 사회는 부르주아의 세력 증대로 동요를 겪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학교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학교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교사들의 권위는 제자리를 찾았고 학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지배방식은 사라지게 되었다. 비로소 신입생 길들이기는 사라져갔고 학생들 간의 관계는 교칙에 따라 체계화되었다. 이제 학교에 평화가 깃들이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1828년부터 1840년까지 럭비사립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토머스 아놀드는 조심스레이러한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이처럼 긴장이 완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기록된 정확한 규칙에 따르는 경기, 인격을 도약할 수 있는 자제력을 포함하는 보다 덜 격렬한 경기가 출현했다. 하지만 두 형태 (축구 association football의 초기 형태인 드리블링 게임 dribbling game과 럭비 rugby football)로 나타난 근대 축구의 탄생을 실제로 주재한 것은 아놀드 이후 세대의 사립학교 교장들이었다. 새로운 면모를 지닌 경기는 공 크기의 규격화, 경기장 범위의 확정, 선수수와 경기시간의 확정 등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이후 개인적인 역할과 자제력이 더욱더 중시되었고, 난폭함보다는 동작의 민첩성이 더 높은 가치로 평가되었다.

축구협회의 창설

1845년경, 사립중고등학교들은 경기의 규칙을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 이제까지 정리된 규칙을 명문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튼과 해로 같은 유서 깊은 유명한 학교들은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거나 공을 손으로 만지지 못하게 하는 따위 규칙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드리블링 게임이다.

1863년, 이튼, 웨스트민스터, 해로 같은 남부 클럽들의 소수 대표들이 런던의 프리메이슨스 태번에 모였다. 이들은 시합을 활성화하기 위해 현행의 다양한 규칙을 조정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케임브리지의 규칙들을 채택하기로 결정했고, 아울러 일종의 연맹인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 F.A.)를 창설했다.

회합에 참여했던 럭비 사립학교의 대표는 그러한 결정에 따르지 않았고, 손을 사용하는 경기를 계속하고자 했다. 1871년, 이러한 경기방식을 옹호하는 이들이 회합을 가졌고, 럭비 풋볼 연합(Rugby FootballUnion)을 창설했다. 이렇게 하여 축구와 럭비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1850년대 말, 셰필드의 한 클럽을 중심으로 경기 규칙들이 다소 다른 또 하나의 연맹이 탄생했다. 1877년, 셰필드는 F.A. 와 보조를 함께하게 되었다. 1871년, 컵(Cup), 다시 말해 영국 컵의 창설이 경기규칙의 통일에 많은 기여를 했다. 컵은 일정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여러 경기들을 포함했다.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축구

1860년대 말에 시작된 축구의 영역확장은 지역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1860년부터 중산계층을 위해 마련된 토요일 오후의 휴무였다.

건강한 육체를 지닌 기독교 정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희망을 이야기하던 사제들이 주도를 하건 그렇지 않건, 이와는 상관없이 소교구를 중심으로 많은 클럽들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클럽들은 중부와 북동부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1880년에 활동하던 전체 클럽 중 25%가 이와 같은 유형에 속했다. 애스턴 빌라, 블랙풀, 볼턴 원더러즈와 같은 대형 클럽들은 이같은 이유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클럽들을 결성하는 제2의 단체는 사교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던 퍼브(pub)였다. 퍼브는 선수들을 관리하기 위해 명부를 작성했고 대부분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1870년대부터 셰필드, 버밍엄 등지에서 창설된 기업 클럽들은 1870년대 말에는 약 20개 팀에 이르렀다. 웨스트 햄 클럽을 창설한 이는 철강 공장인 템스 아이언웍스의 소유주인 아놀드 힐스였다. 하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클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이 철도 직원들로 이루어진 팀들이었다. 다른 클럽들은 노동자주택단지의 젊은이들이 주동이 되어 창설하거나 크리켓 클럽에서 직접 비롯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사립 중고등학교의 졸업생들이 발기를 주도했다.

축구의 영역 확장과 더불어 버밍엄주(1882년에 52개 클럽), 랭커셔주(1878년에 30개 클럽, 1886년에 114개 클럽), 노퍽주와 에섹스주(1882년) 등지에서 새로운 연맹들이 결성되었다. 모든 연맹들은 F.A.를 중심으로 삼았는데, F.A. 는 1883년에 설립된 국제평의회(International Board)가 통일된 규칙을 채택하도록 노력했다. 그리하여 1882년에 들어서면 1000개 가량을 헤아리는 클럽들이 F.A. 에 가입하게 되었다.

프로페셔널리즘의 도입

축구 역사의 초기에 클럽의 관리자들과 클럽 소속 선수들은 아마추어 정신을 보존하려고 애를 썼다.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고 즐기기 위한 경기가 이루어졌으며, 자제력과 예의가 권장되었다. 경기는 ‘위험한’ 계층들로 이루어진 관중을 위한 전시물이나 노동이 아니었다. 1880년까지 컵 결승에 진출한 모든 팀은 사립중고등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팀들이었다. 그러다가 1870년대에 랭커셔주에서부터 대중화가 시작되었고, 곧 보상금과 이적비의 형태로 금권이 개입되었다.

1883년, 컵의 결승전에서 블랙번의 노동자들이 이튼에 승리하면서 엘리트 계층의 지배는 상징적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유력 인사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위원회들을 조종하는 것이 HARRISONSHELTON Copyright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유력 인사들은 더 많은 보조금을 투입했다. 철강 사업자인 시드니 예이츠는 자신의 클럽인 웨스트햄에 100파운드를 기증했다. 예산은 급등했다. 매표창구로 들어오는 수입은 1630파운드였지만 볼턴 원더러즈의 예산은 1949파운드에 달했다. 후원금과 복권 수입으로 부족분을 메워야 했다. 몇몇 클럽은 주식회사 형태로 프로페셔널리즘을 도입했다. 1891년, 아스날은 10파운드나 20파운드짜리 주식을 팔아 860명의 주주를 모았다. 1888년 12개의 클럽은 풋볼 리그(Football League)를 창설하고 국가 선수권 쟁탈전을 주최했다. 그렇다고 F.A.의 권위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드리블링 게임에서 패싱 게임으로

경기 방법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컵의 경기들을 통해서였다. 처음에는 11명의 선수들 중 8명이 공격수를 맡았다. 1871년에 이르러서야 골키퍼는 손을 이용할 수 있었다. 1874년부터 공격수는 7명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셋이 센터 포워드를 맡았다. 케임브리지팀의 주도에 따라 공격수는 5명으로 제한되었다. 후방에 센터 하프백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기장에서의 선수 배치는 영국 제도(島) 전체로 파급되었고, 1920년대 말에 들어서면 전세계에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드리블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이는 사립중고등학교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사립중고등학교의 졸업생들은 드리블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곤 했던 것이다. 공격수들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공을 몰고 다니며 세 명밖에 되지 않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수비망을 뚫으려 했다. 따라서 경기는 격렬한 질주를 통해 개인적인 묘기를 추구하는 양상을 띠었다. 사실 선수들과 그 소속 팀에게 명성을 가져온 것도 그런 묘기였다. 그러나 노동자계층이 참여하면서 점점 늘어난 관객들이 개인의 묘기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성과를 원하게 되면서 경기의 성격은 스코틀랜드식 집단경기로 바뀌어갔다. 그리하여 1876년경, 패싱 게임 (passing game)이 드리블링게임을 대체했고, 노동자들의 공동체 정신이 부르주아의 개인주의를 대신하게 되었다.

20세기 초의 영국 축구를 보여주는 모습

20세기 초의 영국축구

1905년, 1만 개의 클럽들이 F.A.에 가입되어 있었다. 1910년, F.A.는 아마추어 선수 등록증 소지자들의 수를 30만으로 추산했다. 마침내 축구의 대중화가 완료되었고, 선택된 부르주아 계층의 선수들은 이미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언제나처럼 F.A.는 대부분의 클럽 위원회들과 마찬가지로 중산계급의 손으로 관리되었다. 1890년과 1891년에는 아일랜드 리그(Irish League)와 스코틀랜드 리그(Scottish League)가 시작되었고, 1892년 이후 풋볼 리그의 남부 지역 경쟁자 역할을 하던 서던 리그(Southern League)가 1894년 발족했다.

알다시피 프로페셔널리즘에는 자본주의 시장의 법칙이 적용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일정한 규정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이적비용은 제한을 초과하는 일이 빈번했다. 1905년, 앨프 커먼이 선더랜드에서 미들스버로로 이적하며 1000파운드를 받은 것이 그 예이다. 1907년까지도 이적비의 총액이 350파운드를 초과할 수 없었다. 프로 축구 클럽들은 기업들과 결연했고 결연기업의 운영방침을 받아들였다.

이제 축구는 더할 나위 없는 인기를 누리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컵의 첫번째 결승전에 2000명에 지나지 않았던 관객수는, 1888년에는 1만7천, 1893년에는 4만 5천, 1901년에는 11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전통을 자랑하는 다양한 대항전들이 있었기 때문에 관객은 끊임없이 쇄도했고, 이에 따라 더욱 넓은 경기장을 건축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경기장이 건축되는 동안에는 관객들을 돌려보내는 일이 잦았다. 축구는 3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가장 활발한 대중문화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노동자들은 수백 가지 신문들이 전하는 경기의 결과를 일상의 화제로 삼았다. 경기 종료 30분 후면 런던의 신문들이 판매되었는데 이는 경기장에 훌륭하게 갖춰진 기자실과 전화 덕분이었다.

 

참조: 축구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반영해주는 거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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