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전파되는 축구 1편

세계로 전파되는 축구 1편

축구 세계화에 숨은 주역 영국

영국의 세계 경영이 확장된 이면에 숨은 주역이라면 전세계에 전파된 축구를 들 수 있다. 1874년에는 보타포고와 브라질의 해변에서 10여 년 후에는 포르투갈과 마르세유에서, 그 고장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선원들의 축구경기를 구경했다. 축구를 지속적으로 즐긴 이들은 선박회사의 현지 직원처럼 영구 정착한 영국인들이었다. 1872년 르아브르의 사우스웨스턴 철도회사의 직원들이나 1890년 포르토나 빌바오 항구의 상사 직원들이 그들이다. 리스본의 전신 설비회사 직원들이나 1885년경 리오틴토 탄광에서 작업하던 이들과 같은 기술자들도 축구를 전파하는 선봉장이었다. 영국인들이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에 세운 사립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영국 학생들 또한 그곳 주민들을 경기에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예들은 1860년대 스위스의 영국 기숙학교, 1870년 이후의 부에노스아이레스, 1892년의 멀하우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럽 대륙 사람들 스스로 적극 나서서 축구를 도입하기도 했다. 연수를 마친 후 짐 속에 공을 챙겨 영불해협을 건넌 영어교사, 훗날 도이처 푸스발분트(Deutscher Fussballbund)의 회장을 맡은 F. W. 노에, 벨테트 드 투르코앵, 데자뉴 다미앙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영국의 사립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유럽 대륙의 학생들도 같은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 직접 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경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한 경우도 있다. 마르세유나 바르셀로나에 축구가 전해진 것은 이미 축구에 익숙한 스위스 상인들 덕분이었다.

축구하는 모습

스위스와 북서부 유럽의 정복

스위스가 오랜 축구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사립교육기관에 유달리 많은 영국 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이 가능하다. 근대 축구가 태어나기 전인 1855년부터 제네바에 있는 랑시성(城) 사립 교육기관에서 축구경기가 행해졌다지만, 1869년에 같은 도시에 있는 샤틀렌 사립 학교의 학생들이 몰두한 경기가 축구인가 럭비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든 로잔풋볼(Lausanne Football)과 1880년에 영국인들이 설립한 크리켓 클럽(Cricket Club) 내부에서 축구는 오랫동안 영국인만의 관심거리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독일어권 스위스에서 1879년 F.C. 생갈이 탄생했고, 이어 1886년 취리히에서 F.C. 그래스호퍼가 탄생했다.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축구의 기초를 가르치려 애쓰던 어느 영국인의 업적이었다.

영국과 활발한 무역을 벌이는 한편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덴마크는 일찍이 축구를 도입할 수 있었다. 1876년에 최초의 클럽이 코펜하겐에 탄생했고, 덴마크 선수들 간의 정기전이 1878년부터 이루어졌다. 이는 스위스보다 앞선 것이다.

네덜란드 역시 다른 유럽 국가보다 먼저 축구를 받아들인 편에 속한다. 1870년 이후,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 빔물리에는 하를렘셰 F.F.C.를 창설했다. 그때까지 통일된 규칙을 확정하진 못했지만 1860년대부터 브뤼주, 브뤼셀, 앙베르의 영국 사립중고등학교에서 축구경기를 해왔던 벨기에도 사정은 같다. 최초의 축구 클럽은 1880년에 창설된 안트워프 F.C.이다.

곧이어 중부유럽을 정복하다

1870년대 초, 독일에 거주하던 영국인들은 처음에는 럭비와 비슷한 경기를 했다. 그들과 함께, 1874년에 브룬스비크의 어느 학교에 실질적으로 축구를 소개한 콘라트코흐가 독일 축구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독일 축구의 개화기는 여러 가지 양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어 카셀에서는 영국인의 경기를 본 후 경기장을 빠져 나온 독일의 젊은이들이 공을 차며 즐겼고, 함부르크의 축구 선수들인 슈반트 형제는 1880년경 슈테틴으로 이주하여 클럽을 창설했으며, 남부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던 젊은 교사 발터 벤제만은 1890년에는 카를스루헤와 스트라스부르의 김나지움(독일, 스위스의 중등교육기관: 역주)에 축구를 소개해 주었다.

1887년부터 영국인들이 로우잉 클럽 (Rowing Club)에서 축구를 했지만 1892년 프라하에 도이처 푸스발 클럽 (Deutscher Fussball Club)을 설립한 이는 어느 프랑크푸르트 사람이었다. 이듬해, 회원들 중 하나가 그라츠에 축구를 들여왔다. 최초로 크리켓 클럽에 가입한 오스트리아인 M. J. 로이테의 말처럼, 빈크리켓 클럽과 퍼스트 빈 F.C.의 영국인들, 로트실트의 정원사들이 1892년경부터 예이텐비제에서 즐기던 축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고장 소년들을 사로잡았다. 헝가리에 축구가 도입된 것은 이보다 조금 뒤인 1896년이라고 기록된다. 이해에 런던에서 돌아온 카롤리 로벤로젠이 성가대 대원들에게 축구를 권유했던 것이다. 보다 남부인 자그레브에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것은 스웨덴에서 귀국한 어느 교사였다. 또한 벨그라드 시민들이 축구를 즐기기 시작한 것은 1896년으로 여기에는 어느 독일인의 노력이 숨어 있다.

러시아가 그 뒤를 이었다. 188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인과 독일인이 경기를 벌였지만 러시아인은 참여하지 않았다. 1892년 세묘노보 경기장에서 자전거 경주가 열렸을 때 러시아인 간의 경기가 최초로 벌어졌다.

뒤늦은 출발: 프랑스 축구의 여명

독일이나 스위스에서도 그랬지만 영국인들이 벌이는 경기도 아직까지 일관된 원칙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르아브르의 사우스 웨스턴 철도회사 직원들만 해도, 1872년에는 모범적인 어소시에이션 축구를 선보였지만 1885년에는 손의 사용을 허용하는 ‘콤비네이션’ 경기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북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럭비가 우위를 점하는 가운데, 1888년 파리의 몽주 사립 학교에 축구가 등장한다.

이 학교는 정보를 얻기 위해 이튼 사립 학교에 미리 학생들을 파견해 놓았다. 1890년부터 축구는 노르, 노르망디, 파리의 상업학교들과 여러 중등교육기관에 뿌리를 내렸다. 루앙(1892)과 카앵(1893)에 큰 장이 설 때와 프랑스의 스포츠 활성화를 위해 헌신한 유명한 선전활동가인 파샬 그루세가 주최한 학교 대항전을 이용해 이들은 선수권 쟁탈전을 벌였다. 학교와 무관한 클럽의 창단에는 영국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화이트 로버즈(1891)와 스탠다드(1892)는 영국인만 가입을 허락했을 정도였다. 샤프중학교, 장송드사이 고등학교, 영국계 사립 학교인 베르나와 프레스의 졸업생들이 프랑스 클럽의 주춧돌이 되었다. 장밥티스트세이 고등학교의 몇몇 졸업생들은 뇌이의 스포츠 서클을 설립했다. 그중 제오 뒤아멜은 장차 프랑스 축구의 기념비적 인물이 된다. 프랑스 축구의 기원지인 세 지역과 세트 등 남부의 항구(1894)를 제외한다면, 다른 지역의 축구 보급은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남부유럽과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한축구

영국인의 진출이 특히 활발한 포르투갈에서는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겠지만, 스페인, 특히 스위스인들이 활약을 했던 독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리스본에는 어느 전신회사의 직원들이, 포르토에는 포도주상사의 직원이 축구공을 전해주었다. 처음에 스페인에서는 영국 거류민들 사이에서만 경기가 행해지다. 1894년 빌바오에 지역 선수들을 포함하는 클럽이 탄생했다. 바르셀로나의 동부에 축구를 들여온 이는 스위스인 곰퍼였다.

이탈리아의 경우 역시 다르다. 남부의 항구들에서 영국 선원들 간의 경기가 이루어졌음을 주목하더라도 모든 것은 1895년 이후에야 뒤늦게 시작되었다. 축구 도입에 앞장선 것은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전통적 사회운동이 이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부와 중부 지방에는 체조단체들이, 남부에서는 나폴리의 항해 서클과 같은 엘리트 스포츠 서클들이 탄생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영국 거류민들 사이에 일찍이 받아들여진 축구가 본토인들의 흥미를 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870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크리켓 클럽에서 경기를 했고, 1890년경에는 영국 사립 중고등학교에서 경기가 벌어졌다. 모든 시합에는 영국 클럽들만이 참여했다. 브라질도 사정은 같았다. 1890년부터 영국인 간의 대항전이 열렸지만 지역연합은 1900년에야 탄생했다.

전세계로 전파되는 축구, 남부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를 정복한 축구하는 모습

엘리트주의: 초기 유럽 대륙 축구의 성격

한때 유럽에서는 영국의 스포츠를 선호한다는 것은 근대적이며 귀족적인 생활양식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세기말의 사회에서 축구를 한다는 것은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독일인 선각자들이 배격하던 영국에 대한 동경심도 한몫을 했다. 축구는 드 라블리나 둘트르몽 같은 벨기에 귀족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프랑스의 귀족들은 영국에서 목격되는 페셔널리즘을 이유로 들어 축구를 배척했다.

어디서든 상류층 자제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1890년 무렵 프라하에서는 호화로운 차림을 한 부모들이 아들들의 경기장을 찾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1896년 대영제국의 대사는 경기장 밖에 있었고 실업가 베른도르퍼는 경기장에 있었다. 1884년의 함부르크에서는 사업에 성공한 상류층은 의무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지역 팀에 입단시켜야 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축구가 백인 엘리트의 전유물이던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규칙은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자 축구를 계속한 졸업생들은 중년에 접어들었다. 선구자들은 저명한 기자들, 행정관들, 법학자들이 되었다. 세기말, 그라츠의 팀의 멤버는 대다수가 의사였다. 1910년경, 상업에 종사하는 독일인들이 협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요일 휴무가 제도로 정착하면서 여유시간이 생긴 독신자들(이들은 대부분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은 사회 엘리트들과 교제할 수 있기를 열망했다.

사회 연합운동의 발전

스포츠가 보다 건전한 젊음을 양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견해가 일반화되면서 사회 스포츠 활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890년부터 빌헬름 2세는 프러시아 정부에서 경기활성화를 위해 창설한 중앙위원회의 활동을 장려했다. 프랑스나 다른 나라에서는 위원회를 통한 민간 차원의 장려책이 고려되었다. 쿠베르탱의 위원회가 그 일례이다. 1901년 프랑스에서 제정된 것과 같은 협회들에 관한 한층 자유로운 법률들이 형식적 제약들을 보다 완화했고 클럽의 증설을 허용했다. 프랑스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을 참고하던 몇몇 선구자들의 주도로 하나둘 클럽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영국인의 역할은 어디에서나 지배적이었다.

1904년부터 독일의 주요 도시들은 각각 축구 클럽을 갖게 되었는데 두 팀, 심지어 세 팀을 보유하는 도시도 있었다. 최대의 연맹인 도이처 푸스발분트에 가입한 협회들은 모두 합해 194개였다. 괄목할 만한 진일보가 이루어진 것은 전쟁 직전이었다. 1914년, 협회는 2000개가 넘었고 회원수는 20만에 가까웠다.

한편 벨기에의 클럽수는 1898년에 21개, 1906년에 61개였으며 스위스의 클럽수는 1900년에 20개, 1917년에 114개였다. 1896년, 파리의 인구 밀집 지역에만 25개의 팀들이 있었다. 1903년에서 1904년 사이에 프랑스의 축구럭비를 앞질렀다. 그러나 협회들 간에는 여전히 의견의 불일치가 지속되고 있었다. 끊임없는 분할과 기구 개편이 이를 증명해 준다.

 

참조: 세계로 전파되는 축구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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