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전파되는 축구 2편
시작된 대항전들, 영국의 절대적 우위
유럽 대륙의 클럽들에서는 다양한 운동경기들을 병행해 나가고 있었다. 흔하지 않던 대항전은 봄과 가을에 임시 경기장에서 벌어졌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선수들이 직접 골대를 세우기도 했다. 경기복은 인근 카페나 경기장에서 갈아입었는데, 비록 낡은 바지의 무릎단을 자른 것이긴 했지만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얼마 후 사라진 선수 모자는 경기 시작 전에 기념촬영을 할 때에만 썼다. 정해진 일정 없이 벌어지던 시합은 우호관계를 다지려는 목적을 지녔다. 1894년, 오스트리아의 연례 대항전은 세 경기에 지나지 않았다. 퍼스트 빈은 1895년에서 1896년 사이에 아홉 차례의 경기를, 1897년에서 1898년 사이에 열세 차례의 경기를 가졌다. 파리의 연례 토너먼트에서는 1893년 이전에 창설된 세 개 팀이 맞붙었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는 파리 토너먼트의 우승팀이 노르망디나 노르 지방의 우승팀과 대전했다. 프랑스 선수권 대회의 초기 형태이다.
국제 경기에서는 일찍부터 클럽들이 맞붙었다. 1888년, 카를스루헤는 리에주를 7대 0으로 꺾었고 프라하와 빈에게도 승리했다. 하지만 1897년에서 1898년 사이에 코펜하겐은 또 하나의 훌륭한 독일팀 함부르크에게서 두 차례나 승리를 Il est interdittaire거두었다. 1908년에 프랑스의 선발팀을 17대0으로 완파한 덴마크 선발팀이 당시 유럽 대륙의 최강 팀이었다. 1905년, 벨기에에게 7대0으로 진 프랑스는 북서부 국가들보다도 한 수 아래에 있었다.
모두들 고대하던 영국과의 경기에서는 영국의 탁월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1899년, 옥스포드는 영국인들도 포함되어 있던 퍼스트 빈을 15대 0, 13대 0으로 압도했다. 1906년, 프랑스도 영국의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15대 0으로 패하는 마찬가지 시련을 겪었다. 1899년, 독일 역시 축구 종주국에 13대 2, 10대 0으로 두 차례의 패배를 경험했다.
여전히 거칠기만 한 축구
초창기의 축구 시합들은 이전부터 유럽 대륙에서 행해지던 럭비와 유사한 점이 많았으며, 같은 선수들이 뛰는 경우도 있었다. 골키퍼와 후위 수비수들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은 골로 드리블하기 위해 공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 이유로 골 가까운 곳에서는, 수비수가 공을 빼앗아 걷어차기 전까지 복잡한 혼전이 벌어졌다. 로빙으로 떠오른 공은 몇 안 되는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패스는 무시되었다. 모두들 손의 사용금지 규칙에 정신을 쏟았고 두 팔을 몸통에 붙이려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심판이 가장 세심하게 감시하는 사항이 그것이었다. 다음 시기인 1900년경에는 선수들이 의무적으로 사신들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수비수들은 골 앞에 고정된 듯 머물렀고 다섯 명의 전위는 반드시 일렬로 늘어섰다. 경기는 격렬했다. 럭비처럼 어깨로 거칠게 태클하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다. 1899년에는 퍼스트 빈과 크리켓의 경기가 부상자의 속출로 중단될 정도였다. 사정이 그러했던 만큼 영불해협을 건너온 팀들의 경기를 보며 느끼는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들은 짧은 측면 패스를 구사하며 발의 안팎을 고루 사용했고 머리로 공을 정확하게 굴절시켰으며 움직임이 없는 상대편 선수의 주위를 자유롭게 선회했다. 유럽 대륙의 선수들은 그들의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
축제 분위기
클럽들의 조직은 도시 엘리트의 사교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00년 라이프치히 클럽의 창설 3주년 행사처럼 일찍부터 창립기념일에는 리셉션이 함께 있었다. 초기에는 경기의 승패 여부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축제나 다름없는 경기는 우호관계를 맺는 수단이었고, 경기 외적 주변사들이 최종 스코어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다. 1894년 베를린 소재 한 클럽의 선수들과 후원자들은 다음날 그들과 대적할 브레메 진영을 역에서 환호로 맞이했다. 그들은 상대팀을 호텔로 안내했고 밤늦게까지 축하연을 베풀었다. 연회 시작 전과 연회중에는 축사가 이어졌다. 다음날 아침에는 도시를 방문했는데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피곤한 일이었다.
막상 경기에 출전하려니 겨우 복장을 갖출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기가 끝나고 작별인사 소리들이 울려퍼지는 역을 통해 손님들이 돌아가기 전에 하루를 마감한 것은 요란한 축배였다. 모든 사회계층에 파급된 축구경기의 영향은 후에 산업도시의 소외계층 사이에서 새로운 공동체들이 형성되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축구경기를 통해 참여자들은 연대의식과 축제의 기분, 다시 말해서 사회 편입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셈이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새로이 일구어내면서 축구는 근대산업사회가 새로운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기여했다.
국가연맹들의 탄생
팀들 간의 시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상호 연결을 돕는 조직, 다시 말해 연맹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일었다. 1889년부터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영국의 본보기를 따랐다. 1895년에 탄생한 스위스의 연맹은 11개밖에 안 되는 클럽으로 대회를 조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F.A.에 허가를 청원해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클럽들이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관장했고 축구가 도래하기도 전인 1899년에 이미 최초의 연맹인 U.S.F.S.A. (Union des Sociétés Françaises Sportives et Athlétiques, 프랑스 스포츠 · 운동 단체 연맹)가 탄생했다. 연맹은 영국의 클럽들이 별도로 조직을 갖추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후인 1894년에야 축구를 용인했다. 곧이어 축구인들만을 위한 후원연맹과 리그(L.F.A.)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축구가 자율성과 단일성을 갖추게 된 것은 F.F.F.A.가 출범한 1919년에야 가능했다. 벨기에는 처음에는 프랑스처럼 갖가지 경기를 포괄하는 형태를 추구했다. 하지만 1912년부터 벨기에 축구 단체 연맹 (U.R.B.S.F.A.)’이 축구의 자치권을 획득했다.
나치스 치하 독일의 정치구조적 문제로 독일의 연맹은 지역조직들의 융합이 실현된 후에야 뒤늦게 탄생했다. 오스트리아는 국가적 위기가 원인이 되어 단일 연맹의 구성이 늦게 이루어졌다(1904). 러시아는 1912년에야 연맹을 창설했다. 브라질은 국토의 광활함 때문에 양차 대전 사이의 기간까지 단일 연맹을 형성할 수 없었다.
중앙집권화와 행정화
많은 정기 대항전들을 주최하고 통일된 규칙을 채택하게 되면서 점차 관료주의화가 요구되었다. 그에 부응해 프랑스(1901)나벨기에 (1921)에서는 협회들에 관한 입법 요청에 부응하여 위원회들이 구성되었다. 연맹은 클럽의 내부 활동을 관장하는 법규를 마련하고 선수의 등급을 분류하는 한편, 신분증과 다름없는 허가증을 이용해 선수들을 관리했다. 그 결과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자기 지역의 경기를 관리하던 지역 리그들은 F.F.F.A.의 감독을 받았다. 연맹들의 수뇌에 생겨난 많은 위원회들은 위원회의 권한 확장을 상징한다. 1900년, U.R.B.S.F.A.는 집행위원회, 소환위원회, 스포츠위원회, 중재위원회를 각각 하나씩 갖추고 있었다. 특별위원회들은 재무에 관여했고 아마추어주의, 보험, 선수 선발 등을 관리했으며 권리문제들을 해결했다. 연맹들은 상해를 초래한 경기장 폭력행위를 심판하고 그에 따른 징벌권과 사면권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는 사법부의 재판권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연맹은 선수자격을 박탈할 권한도 쥐고 있었다.
영국에서처럼 축구는 대중화되었다
1900년까지만 해도 축구는 영국 제도를 제외한 여러 지역에서 중산계급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곧 사회적 전이가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레이싱 클럽과 같은 몇몇 클럽들은 여전히 폐쇄적이었지만 다른 클럽들은 기꺼이 하층계급 출신의 선수들을 받아들였다. 출신계급보다 자질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연맹들과 별도로 ‘소바주(sauvage)’라 불리던 경기를 벌이는 서민 거주지역의 팀들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이런 팀에 참여하는 젊은 노동자들은 드물었다. 고된 노동일을 해야 했던 그들에게 경기장에서의 부상이란 실직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부 지역에서 사회법이 가결되자 노동자들의 입단은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1903년과 1913년 사이에 루르의 F.C.샬케 04에는 22명의 광부, 15명의 노동자, 5명의 봉급생활자, 2명의 자영업자가 포함되었다. 프랑스의 북부 지방에서는 양모도매상 레몽 뒤블리가 1918년 이후에는 경기장에서 계층융합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1920년부터 걸출한 선수들이 서민계층에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몇몇의 인생 역정은 거의 신화에 가깝다. 탄광의 견습 갱부였던 코파, 리오의 변두리 공터에서 맨발 로 축구를 했던 브라질의 가린차들이 그들이다.
축구의 확산에 기여한 요소들
지도자들의 의지와 별도로 축구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요인을 몇 가지 짚어볼 수 있다. 그중 하나로 20세기에 이루어진 교통수단의 비약적인 발달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로써 축구경기는 더욱 많은 관중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경기가 벌어지는 지역은 철도망과 연계된 지역과 일치했고, 역이 있는 곳에는 축구경기장이 들어서는 것이 당시의 통례였다. 자동차의 출현과 함께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도 축구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선수들은 자전거로 이동을 하곤 했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었다.
영국에서 축구 확산의 주역이라면 학교를 꼽을 수 있다. 1928년, 6000개 학교가 ‘잉글리시 스쿨 F.B’에 소속되어 있었다. 1948년에는 학교수가 8000이 되었다. 1930년, 셰필드에서만 160개 학교 클럽이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한편 기업 축구, 노동자 축구, 교회 축구의 발전은 새로운 사회계층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1920년대부터 급격히 발전한 스포츠 언론은 기독교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축구의 세계를 소개해 주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벨기에에는 1910년에 121개, 1940년에 1600개의 클럽이 있었다. 프랑스의 선수는 1922년에만 해도 이전의 20배가 넘는 3만 명이었고 1987년에는 18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1920년 이후 축구는 세계화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축구를 도입한 것은 식민자들이었다. 따라서 영국령의 식민지에서는 일찍부터 축구가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가나인 황금해안에서는 1903년부터, 이집트에서는 1918년 이후 축구가 일반화되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1912년에 최초의 클럽들이 탄생했다. 프랑스의 식민지에는 이보다 뒤늦게 전해져 마그레브 지방에서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1924년 이집트에서 최초로 축구를 한 이들은 아르메니아인과 이탈리아인이었다. 벨기에 콩고에서는 20개 클럽의 유럽인끼리 경기를 가졌다. 인종 차별이 예외 없이 적용됐지만 교사들, 특히 선교사들은 아프리카 젊은이들이 축구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이 결성한 팀 간에 경기가 벌어질 때에는 종족 간의 오래된 경쟁의식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그후, 토착민들의 연맹들이 창설되어 그들만의 선수권 대회가 마련되었다. 축구의 보급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1919년에 네 개에 불과하던 레오폴드빌의 클럽이 1945년에는 60개로 증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선수들은 대도시로 진출했다.
식민지 제국이 독립하면서 새로운 국가연맹들이 F.I.F.A.에 가입했다. 아프리카 축구는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모로코는 1970년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카메룬과 이집트는 1990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한때 유럽의 감독들은 아프리카 축구의 독특한 스타일을 교정하려 했는데 이는 잘못된 시도였음이 판명났다. 중국과 필리핀에는 1914년 이전에, 타이에는 1918년 직후에 축구가 전해졌지만 아시아의 축구 도입은 다른 지역에 비해 대체로 뒤늦은 감이 있다. 한편 한국과 아랍 국가들의 성장은 주목할 만하다.
국제축구연맹 탄생
1904년, 영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F.I.F.A. 를 창설한 것은 유럽 대륙인들이었다. 네덜란드인 히르슈만과 프랑스인 로베르 게랭이 공동으로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F.I.F.A. 는 각국에 단 하나의 연맹만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국가연맹들이 F.I.F.A.에 가입한 것은 무엇보다 자국 축구경기의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F.I.F.A.에 가입하지 않고는 외국의 클럽과 경기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쥘 리메가 회장을 맡았던 1921년부터 1954년 사이에 F.I.F.A.는 U.N.의 발전에 비견할 만한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다. 취리히에 설립된 F.I.F.A.는 1984년에 150개의 국가연맹, 다시 말해 5200만에 달하는 선수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한동안 망설임이 있었으나, F.I.F.A.는 국가들의 합의에 따라 적용되던 원칙들을 받아들여, 보헤미아 등 독립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국가들의 가입자격을 박탈했다. 로베르 게랭은 F.I.F.A.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 선수권 대회의 창설을 계획했다. 처음에 이 대회는 올림픽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는데, 머지않아 F.I.F.A.가 올림픽의 축구 토너먼트를 관장하게 되었고, 후에는 협회 고유의 대회를 창설했다. 이로써 1930년 제1회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참조: 근대축구의 태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