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성공 비결
축구의 성공 비결은 무엇보다 그 규칙들의 단순함으로 이해된다. 보편적인 것에 일정 부분 수정을 가한 축구의 단순한 규칙은 축구의 본질을 규정해 준다. 선구자들은 축구의 특색을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축구의 특색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기술적이고 전술적 자원에서 이루어진 연구와 연습은 축구의 실제를 변형시켰다.
경기의 규칙과 그 변천
1885년 이전에 대영제국 밖으로 축구를 수출한 영국인들은 자국에서 규정된 규칙도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그렇다고 당시의 규칙들이 통일성을 지녔다거나 완성된 체계를 갖췄던 것은 아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영국을 추종하는 경향을 저지하고 경기를 자국화하려 시도했지만,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영국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벨기에와 스위스 연맹들은 1886년 국제평의회가 제시한 영국 규칙을 주저 없이 자신들의 정관에 도입하려 애썼다. 프랑스에서는 1893년부터 U.S.F.S.A.가 영국의 규칙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유럽 대륙의 국가들은 영국과의 경기를 열망했으므로 이러한 해결책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F.I.F.A.도 이러한 움직임에 보조를 맞췄다.
초기의 심판들은 규칙조차 잘 모르는 자격 미달인 사람들이었다. 경기장 위에서 그들의 행동은 우유부단했고 주장들과 설전을 벌이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축구와 럭비를 혼동하여 난폭하게 상대를 향해 돌격하거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는 선수들이 경기에 참가한 때라면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1925년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칙이 정해지면서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옛 규정에서는 공격수와 골키퍼 사이에 두 명이 있을 때 적용되었지만, 새 규정에서는 한 명만 있어도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다.
축구, 덕성의 수련장?
사회의 지배층은 축구경기장을 이상적인 정신이 지배하는 특별한 장소로 생각했다. 그런 만큼 축구선수는 신중함과 고귀함으로 가득한 품행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에 관련해 언론은 영국의 대학팀인 코린티언스가 선보인 고상한 경기 자세를 칭찬했다. 코린티언스 선수들은 심판의 판정에 불복한다거나 난폭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세기 초의 스포츠 관련 인쇄물을 읽어보면 교육이 축구경기의 지상목표였음을 알 수 있다. 축구는 도덕적 행동의 전파수단이어야 했고, 의지, 용기, 연대의식, 품성을 단련시키는 학과목이었다. 그들은 경기를 지켜보는 관객 또한 이러한 덕성을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영국의 페어 플레이 정신을 강조하던 언론인들과 연맹의 책임자들은, 경기장에서 예절과 공명정대함을 존중하고 그러한 미덕을 일상생활에 적용해야 한다고 젊은이들에게 역설했다. 이런 면에서 스포츠와 실생활이 동일시 되어야만 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축구가 실생활의 규칙을 외면한 채 발전할 수는 없었다. 승부에 걸린 이득이 늘어나면서 이제 본연의 정신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전투 축구와 특공대를 격찬하는 상황에서 페어 플레이를 요구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훈련의 발전
유럽 대륙의 축구는 재빨리 영국 축구의 특성을 받아들였다. 승패 여부에 달린 이득의 증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기에서 이기려는 의지, 결국 정예 멤버를 양성하여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팀의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는 감독의 도움이 필요했다. 대부분 영국인이던 감독은 전문가로서 대접을 받았고 주장의 지위를 빼앗았다. 감독은 신체단련을 강행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프로 선수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이다. 초기에는, 경험론에 따른 건강 관리와 폭음폭식 금지에 기초하는 단순한 영양관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경기에 대비한 훈련은 점차 과학적인 모습을 갖추었고 선수 하나하나의 근육조직에 대해서까지 관심이 미쳤다.
1920년대부터 정신훈련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지식수준에 비추어 뒤처진 것임에 틀림없다. 감독들은 선수들이 각자가 맡은 위치와 역할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다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주요 팀들은 최소한의 결함이라도 간파하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가장 유능한 심리학자들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아프리카에서는 정신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주술사에 의지하는 경우도 있다. 회교국가들에서는 경기장에서 기도를 올리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의 선수들은 후원자들이 양초를 밝히는 가운데 성호를 긋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적이고 전술적인 훈련이다.
거친 경기에서 기교의 경기로
같은 슬로건들이 도처에서 눈에 띄었다. 발전할 것, 종주국인 영국의 기술적 수준에 접근할 것. 경기 자세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도해와 사진을 통해 그것을 분석하는 교본이 널리 읽혀졌다. 이러한 지침서들은 슛을 정확하게 하는 법, 상대를 제치고 드리블하는 법, 공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설명해 준다. 프랑스의 어느 축구전문가는 헤딩을 이용한 플레이를 만류하기도 했다. 이 방면에서 영국이 너무도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들은 왕년의 위대한 선수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축구에 관한 국가적 명성에 따라 영국인들이 가장 선호되었고, 그다음이 헝가리인들이었다.
점차 경기방식이 진보했고 힘보다는 기교가 우위를 점했다. 이제는 일정한 간격으로 말뚝을 세워놓고 그사이를 헤치고 나가며 드리블 기술을 연마한다. 그리고 마네킹을 세워놓고 끊임없는 연습을 한 결과, 프로 선수들은 수비벽 너머로 프리킥을 성공시킬 수 있다. 축구는 놀이가 아닌 노동이 되었다. 오늘날, 공터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차며 축구인생을 시작한 스타들의 신화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하나의 직업이자 확고한 사업으로 자리잡은 축구는 학교와 스포츠 연구 집단을 통해서 교육된다.
참조 : 축구의 성공 비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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