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설립된 전미 야구 선수 협회(NABBP, National Association of Base Ball Players)는 미국 야구를 관장하는 최초의 단체였다.
1857년 16개의 뉴욕 지역 클럽들의 첫 번째 대회는 사실상 니커보커 시대를 종식시켰고, 이 기간 동안 경기 규칙은 대부분 개별 클럽들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경기 규칙과 자체 조직을 관리하는 것 외에도, 협회는 공식적인 채점(보고), “경기” 플레이, 챔피언십, 아마추어리즘, 그리고 대회의 무결성(당시에는 하마드로밍으로 알려짐)에 대한 기준을 세웠다. 스포츠의 발전 추세에 따라, 1869년 시즌에 프로로 전향했다.
1871년에 열린 마지막 대회는 수백 명의 회원들이 국가 협회를 통해서만 대표되었고, 이는 별도의 전문 협회와 아마추어 협회의 설립을 자극했다. 1875년까지 프로 야구를 감독하고 사실상 모든 선수들을 위한 경기 규칙을 제정한 최초의 프로 스포츠 리그로 여겨진다. 아마추어 후계자가 많은 회원을 유치한 적이 없고 몇 번밖에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NABBP는 프로 후계자와 대조적으로 “아마추어 협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북 전쟁 이전에 야구의 시작은 크리켓과 지역 변형 야구, 특히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타운볼과 뉴잉글랜드에서 열린 매사추세츠 게임과 같은 대중의 관심을 위해 경쟁했다. 1860년대에 전쟁의 도움으로 뉴욕 스타일의 야구는 다양한 군단, 연대, 여단 및 기타 부대를 통해 전국적인 경기로 확장되었다. 게다가, 민간인 NABBP는 뉴욕, 브루클린,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대부분의 클럽들이 남아있었지만, 통치 기구로서 진정한 국가 조직으로 확장되었다. 1865년 말, 거의 100개의 클럽이 “국가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867년까지 400명 이상의 회원이 있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태평양 서부 해안에서 루이지애나의 멕시코 만 해안까지 일부 클럽이 있었다. 이러한 성장으로 인해, 지역 및 주 기관들은 스포츠의 거버넌스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구의 폭발적인 인기는 뉴욕 근교에 핵심을 둔 NABBP 조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870년까지 전국적으로 수천 개의 야구 클럽이 조직되었고, 그들 중 대다수는 협회 회원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 전날 밤에 멀리 떨어진 뉴올리언스에는 7개의 야구팀이 있었는데, 그들 중 어느 팀도 NABBP에 속하지 않았다.
NABBP는 처음에 아마추어리즘의 원칙에 따라 설립되었다. 그러나 역사 초기에도 브루클린 엑셀시어 클럽의 제임스 크레이튼과 같은 일부 스타 선수들은 비밀리에 또는 보수를 통해 보상을 받았다. 1866년 NABBP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 클럽이 립 파이크를 포함한 3명의 선수들에게 돈을 지불한 것에 대해 조사했지만, 클럽과 선수들 모두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럽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최고의 선수들의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비공식적인 지불이 보편화되었다. 1868년 12월 NABBP 회의에서 NABBP는 다음 1869년 시즌을 위한 프로 부문을 설립했고, 선수들에게 돈을 지불하기를 원하는 구단들은 제재 없이 자유롭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시내티의 레드 스타킹스는 가장 먼저 그렇게 선언한 선수들이며, 최고의 가용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가장 공격적인 선수들 중의 하나였다. NABBP의 가장 강력한 팀들을 포함한 12개의 클럽들이 1869년 시즌에 프로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중요한 문제는 챔피언십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와 선수들이 한 팀에서 다른 팀으로 뛰어드는 것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3년간의 실험 끝에 1871년에 대부분의 주요 프로 구단들이 해체되어 독립된 프로 야구 선수 협회(NAPBBP, National Association of Professional Base Ball Players)를 설립했다. 초기 NABBP는 주 및 지역 통합으로 해체되기 전에 약 2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전미 프로 야구 선수 협회(NAPBBP)는 프로 야구 최초의 스포츠 리그이다. NA는 1871년에 설립되었고 1875년까지 계속되었다. 1869년, 이전에 아마추어였던 전미야구선수협회는 일부 팀들이 선수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우려에 대응하여 프로 부문을 설립했다.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는 완전한 프로가 되고 싶다는 그들의 열망을 선언한 첫 번째 팀이었다. 다른 팀들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1871년, 아마추어 협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를 원하는 몇몇 클럽들이 탈퇴하여 전미 프로 야구 선수 협회를 설립하였다. 1876년, 더 강력한 중앙 조직을 원했고, NA의 6개 클럽과 2개의 독립 클럽이 내셔널 리그를 설립했다: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 하트퍼드, 뮤추얼, 애슬레틱,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NA와 독립 클럽인 루이빌과 신시내티의 루이스 브라운 스타킹.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의 수명을 제한한 요인들은 하나의 팀 (보스턴)에 의한 리그의 존재의 대부분에 대한 지배, 몇몇은 프로 야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에 너무 작은 도시들에 놓였기 때문에 프랜차이즈의 불안정, 중앙 권한의 부족, 도박꾼들의 영향력의 의심을 포함하였다.
그러던 중 1882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merican Association)이라는 별도의 리그가 창설되고 1892년 내셔널 리그에 합병되어 총 12팀으로 리그가 진행되어 오다가 1899년 내셔널 리그에 소속돼 있던 4개의 팀이 빠져나와 1901년, 총 8개의 팀이 아메리칸 리그라는 새로운 리그를 창설해 마침내 양대 리그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때문에 현대적인 형태의 메이저리그는 190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원래는 내셔널 리그 8개 팀, 아메리칸 리그 8개 팀으로 총 16개 팀이 미국 동부와 동부에 인접한 중부 지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각 리그도 별도의 지구 구분이 없는 단일 리그로 편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리그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8] 여러 새로운 팀들이 창설되어 메이저리그에 참여하였고, 기존 팀들이 미국 서부 지역으로 연고지 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리그 확대와 팀의 증가, 연고지의 이동에 따라 여러 팀들의 원정 거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늘어나게 되자 1969년 연고지를 기준으로 서부와 동부 지구로 재편하였다. 1969년 2개 지구로 리그가 확대 되었을 때의 규모가 양대 리그 각각 10팀씩 총 20팀이었다. 이후 AL와 NL에 각각 1977년 2팀, 1993년 2팀 이렇게 각각 총 4팀씩 생겨 28팀으로 늘어났다. 1년 뒤인 1994년엔 리그 확대에 맞춰 다시 서부, 중부, 동부 지구로 재편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양대 리그 3개 지구 체계가 완성되었다.
초창기에는 경기 수를 못박지 않아서 140~150경기를 전후로 순위를 가리기 위해 경기 수가 들쭉날쭉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1904년 한 시즌을 한 팀당 22경기씩 치러 총 154경기(7팀×22경기)로 확정을 지으면서 정리가 되었다. 그래도 순위를 가리기 위해 1~2경기를 더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차피 순위가 이미 확정돼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경기는 취소될 경우 그냥 생략해버리는 경우도 있었기에 실제 정확히 154경기가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즌은 4월 말에 시작하여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끝났으며, 보통 시즌이 9월 말~10월 극초면 끝났기 때문에 10월 초에 양대리그 우승팀이 격돌하는 월드 시리즈를 가지는 형태였다.
1919년 잠시 한 시즌을 한 팀당 20경기로 줄인 적이 있었는데 바로 흑역사. 이듬해 다시 22경기로 늘어나면서 154경기로 계속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1962년 리그 확대로 각 리그의 팀이 10개로 늘어나면서 팀당 18경기씩, 총 162경기(1962년 당시, 9팀×18경기)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3월 말~4월 초에 시즌이 시작하고 10월 초에 시즌이 마무리되는 형태로 변경이 되었다. MLB는 현재까지 162경기 체제를 유지한다.
미 연방법상 메이저리거는 최고 연방세율 39.6% 적용자인데 이는 미국 내에서 연 소득이 높은 의사, 변호사등과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 저 연방소득세법상 기준이 연소득 $418,400인데 메이저리거 최저연봉이 2022년 기준으로 $700,000이다.
즉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미국 전역에서 야구 엘리트 소리 들을 만한 사람이 된다. 최고 연방세율 적용자라는 것 그 자체가 미국에 정착한 사람으로서는 아메리카 드림의 완성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높은 기준이며 따라서 미국 국세청에서는 최고 세율 적용자를 고급 전문직에 준하는 인원으로 간주한다. 또한 메이저리그는 전세계 스포츠 시장 중 NFL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시장성이 매우 큰 리그이며, 2022년에만 110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낸 상업성 기준 세계 2위 리그이기도 하다.
최저 연봉만으로도 최고 연방세율 적용자에다가 메이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면 연금은 물론, 의료보험, 구단에서 제공하는 뷔페식 고급 요리 등등을 제공해주니 메이저리그는 중남미 소년들에게 성공을 위한 ‘꿈의 무대’로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카리브해를 끼고 있는 많은 나라들(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등.)에는 오로지 메이저리그의 야구선수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야구사관학교까지 꽤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배가 빅리그에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는 걸 동경하며 노력하고 있다.
과거에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야구에만 전념하던 야구소년들이 많았다. 그러나 중남미 아이들이 미국까지 빚져가면서 왔으나 정작 야구선수가 되지 못하자갱이나 도둑으로 전락하면서 미국 치안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부작용이 많이 생겼다.때문에 현재는 우리나라마냥 운동선수가 꿈인 애들은 죽어라 운동만 시키는 게 아니라 선수생활이 힘들게 될 경우를 대비해 영어, 미국문화도 많이 가르치기 때문에 공부 잘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는 카리브해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미국에 매우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카리브해 인근 국가들도 대부분 자체 야구 리그가 있고, 캐리비어 시리즈등 국가 간의 국제전도 있으나 MLB에 비해 규모가 작고, 미국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차이가 적어서 거의 유망주 조공하고 있는 상태다. 또 대표적인 아마야구 최강이라 불리는 쿠바는 프로리그가 없고 실업리그가 있지만 실업리그에 출전해서 버는 돈이 적고, 미국으로 가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하면 수십-수백년치 봉급을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미국와의 수교전에는 미국으로 야구선수가 되려고 밀입국하는 청년들이 많아 사회문제가 되었다. 쿠바가 미국과 수교를 맺기 이전에는 합법적으로 미국으로 가기가 힘든지라 미국으로 가려면 여러 위험한 수단을 동원해야했기 때문에 더더욱 주목을 받았다.
쿠바의 야구선수들은 주로 국제대회 참가 시 선수단을 이탈해서 다른 나라 국적을 따는 방식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입했었다.그러나 이제는 돈 많고 유망주에 관심이 많은 미국 야구단들이 쿠바에 스카우트들을 대거 파견하여 펑펑 돈지랄중이다. 그리고 2015년 7월 미국-쿠바의 복교로 쿠바 유망주의 메이저리그 러시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였는데 정치적인 문제때문에 미뤄졌다고. 이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가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에 여전히 미국으로 망명 가는 야구선수들이 나왔다가, 2019년부터 쿠바야구협회와 메이저리그가 협약을 맺으면서 쿠바 리그 선수들이 합법적으로 미국에 가서 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구체적으로 6년 차 이상의 선수가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가 제동을 걸면서 다시 막혔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이자 전 구단 영구결번자인 재키 로빈슨덕분에 1947년 미국 내에 흑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의 물꼬가 트여 이름을 날린 흑인 선수들도 많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흑인 선수와 유망주들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대부분의 흑인 스포츠 유망주들이 ‘흑인의 강점인 운동능력을 살리기에 더 적합하고’, ‘길고 고달픈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치지 않고 즉시 데뷔할 수 있으며’, ‘장비와 훈련에 돈이 덜 들며 장학금이 더 빵빵해서 경제적 부담이 덜한’ 농구와 미식축구로 많이 빠져나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야구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히스패닉, 유럽, 동아시아 선수들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흑인 주전 포수는 씨가 마른지 오래고 여기에 흑인 선발투수 숫자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반대로 적응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외야수 쪽으로는 흑인선수들이 뛰어난 운동력을 바탕을 빠른 적응력을 보이기 때문에 흑인 외야수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
아시아의 야구국가들도 마찬가지고,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라든가 호주 등 중남미가 아닌 국가들에서도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려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유럽에서 어느 나라도 야구만 해서 제대로 큰 돈 벌 수가 없다. 프로리그도 없는 수준이고 받는 돈이 열악하니 메이저리그를 당연히 노릴 법하다. 호주도 마찬가지라서 메이저리그에서 지원해도 여전히 지금도 호주에서 야구만 하다간 벌어먹기 힘들어 차라리 대만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라도 노리는 경우도 많다.
한국은 메이저리그에 대해 한동안 아로안이었지만 박찬호 활약으로 인해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이 박찬호 열풍 때 많은 유망주들이 건너가는 유망주 러시도 있었다. 일본 같은 경우 유망주로서 바로 진출하는 경우보다 일단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며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눈도장을 찍어 메이저리그의 러브콜을 받거나 직접 문을 두드리는 쪽 비중이 높다. 다만 일본프로야구에서 실패해서 이렇다 할 커리어도 없는 어린 방출자 출신의 선수가 도피유학성으로 미국에 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는데, KBO에서 이런 식으로 간 선수는 대부분 A 이하에서 도태되지만 일본에서 이런 식으로 간 선수는 의외로 AA~AAA 정도는 밟는 경우가 많다. 비록 딱 한 경기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등판한 무라타 토오루 같은 케이스도 있고.
성공하면 얻는 이득 역시 두드러진다. 메이저리그에 43일만 로스터에 등록되어도 사망할 때까지 연간 $30,000 이상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며,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면 연금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또한 단 하루만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록된다면 해당 선수를 포함한 직계 가족들의 헬스케어가 평생 보장이 된다. 미국의 사설 의료보험이 얼마나 비싼지를 감안한다면 삶의 질 자체가 달라질 정도의 혜택을 단 하루만 메이저리거로 뛰고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연봉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는데, 메이저리그는 전 세계 스포츠 리그 중 최고 수준의 연봉을 지불하는 리그이다. 이것도 MLB가 주춤한 사이 유럽 축구, NBA 등 세계화가 더 잘 된 타 리그들에게 따라잡힌 것으로, 예전에는 박찬호의 연봉이 세계적인 축구 스타 몇 명의 연봉을 합친 수준인 적도 있있다. 첫 문장에도 있듯 연방법 최고세율 적용자가 된다. 일본야구중계 연방세법 최고세율은 엘리트를 가르는 기준 중 하나로 자주 인용되는 기준이며 메이저리거는 의사, 변호사 등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엘리트 전문직 대우를 받는 집단이다. 이것은 관습적인 것이 아니라 연방소득세법 상의 기준이다.
그에 비해 마이너 리그의 푸대접역시 유명하기도 하다. 소위 ‘Winner takes it all’로 설명할 수 있는 미국의 빈부격차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 급여도, 대우도, 그냥 같은 시간 동안 일하는 동네 슈퍼 아르바이트 수준이라 보면 된다. 해외축구중계 연방세법 최고세율을 다 뜯기엔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다. 다만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일본, 한국, 대만 등 주요 아시아 리그행 러시로 인해서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유출이 가속화되자, 마이너리거도 어느 정도 봉급이 올라서 트리플A급 상위리그에 좀 뛴 선수라면 대충 돈을 벌 정도로 오르기는 했다. 무료티비 물론 하위 리그는 여전히 얄짤없이 먹고 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