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성공 비결
축구의 성공 비결은 무엇보다 그 규칙들의 단순함으로 이해된다. 보편적인 것에 일정 부분 수정을 가한 축구의 단순한 규칙은 축구의 본질을 규정해 준다. 선구자들은 축구의 특색을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축구의 특색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기술적이고 전술적 자원에서 이루어진 연구와 연습은 축구의 실제를 변형시켰다.
수비 위주 경기로의 변화
전술적 차원에서 각 선수의 위치 배정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유수한 팀들은 연습을 통해 여러 조합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수정해 나갔다. 상대의 수비벽을 돌파하고 공격을 차단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결과, 선수들의 특별한 경기장 배치 형태를 얻어냈고 모든 팀들이 그 형태에 적응하게 되었다. 1925년의 오프사이드 규칙 개정으로 ‘W.M.’이라 불리던 시스템이 두각을 나타내어 19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후, 경기 결과에 내걸린 보상이 늘어나자 수비에 치중하는 쪽으로 변해 갔다. 무엇보다 골을 주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다양한 전술적 배치들이 창안되었다. 스위스인 감독 라팡의 ‘빗장(verrou)’, 에레라의 이탈리아식 ‘카테나치오(catenaccio)’는 프랑스의 철저한 방어 위주 전략의 기초를 이룬다. 이러한 시스템들 아래에서 두번째 중앙 후위, 리베로가 출현했다.
1952년, 헝가리 국가대표팀은 두 명의 센터 포워드와 네 명의 후위를 배치하고 경기를 했다. 이것이 한 수 위로 평가되던 공포의 대상 영국 팀을 상대로 두 차례나 승리를 일궈낸 4-2-4 시스템이다. 이런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감독들은 지역방어를 선호했던 반면, 다른 감독들은 공격수의 오프사이드를 유발할 수 있는 일자형 수비를 선택했다. 수비 강화는 계속되었고 1970년대 초에는 433. 심지어 44-2까지 출현했다. 오늘날, 몇몇 팀들은 최전방 공격수 한 명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새로운 축구는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볼만한 구경거리는 끝났나?
중요한 것은 단지 결과일 뿐이다. 이것이 감독들과 선수들의 신조였다. 골을 주지 않으려면 미드필드를 철저히 장악하고 상대의 위협을 원천봉쇄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전략이었다. 공격에 나설 때에는 미드필드는 물론 후위의 선수들까지 공격에 가담했다. 이후, 팀은 공격과 수비의 매순간에 전체가 참여했다. 1960년대까지 한 명의 풀백이 골을 지킨다는 것은 괴상한 광경이었지만 오늘날은 평범한 전술로 여겨진다. 1970년대 초, 토털 사커라는 이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한 팀은 암스테르담 아약스이다.
관객의 측면에서 이러한 경기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득점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클럽 챔피언을 가리는 유럽컵 결승에서의 득점은 1956년에서 1965년 사이에는 4.7골, 1966년에서 1975년 사이에는 3골, 1976년에서 1985년 사이에는 고작 1.4골로 줄어들었다. 프랑스 선수권전의 1부 리그에 기록된 골의 평균은 1933년에서 1934년 사이에 4.5골이었지만 1965년 이후에는 3골 이하로 떨어졌다. 1984년~1985년 시즌 이탈리아의 평균 득점은 2.1골이었다. 수비망이 단단해지면서 경기는 더욱 격화되었고, 심판들은 무기력증에 빠진 공격수를 위해 페널티킥의 기준을 완화했다. 이후 많은 경기들이 단 하나의 페널티킥으로 승부를 가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최종 승부의 결정에서 심판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프랑스는 공격축구를 부활하기 위해 세 골 득점시 보너스를 주는 방식을 실험적으로 도입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전문선수에서 만능선수로
세기 전환기에는 경기장에서의 역할 전문화가 공장에서처럼 엄격히 이루어졌다. 맡은 포지션에 따라 부여되는 가치도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가장 거친 선수들이 풀백으로 포진했고, 그런 탓인지 이들은 도급노동자의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다. 1939년 이전의 에티엔 마틀러와 1950년대의 로제 마르슈가 그러한 선수들이었다. 중앙 후위의 이미지는 한층 돋보였다. 중앙 후위는 위치감각을 지닌 수비의 관제탑이었다. 세 명의 최전위는 섬세함, 창의력, 민첩함을 오랫동안 독점했다.
영사기들은 그들에게 집중적으로 향했다. 이러한 선수들 중에서, 1954년 월드컵에 등장한 오스트리아의 축구 대가 스토야스팔, 포수(砲手) 퐁텐, 페인트 모션을 하고 슛을 날렸던 드리블러 펠레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W.M. 진형의 시대가 끝나면서 그때까지 불분명한 역할을 했던 하프백과 이너(제일선의 다섯 사람의 공격수 중, 중간의 센터 포워드와 양쪽 윙의 중간에 있는 공격수)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크루이프, 플라티니 등이 대표적인 선수들인데, 그들은 게임을 이끌어가며 득점까지 올리는 수훈자들이었다. 오늘날 선수들의 모습은 점점 더 획일화되는 경향이다. 오랫동안 골키퍼들은 구경거리가 될만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곡예사와 같은 플레이로 박수갈채를 받은 몇몇 골키퍼들은 저명 인사의 반열에 올랐다. 1918년 이후 프랑스의 샤리게와 스페인의 사모라, 1950년대에 활약한 소련의 야신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후에는 엄격하고 절도 있는 플레이가 각광을 받았다.
참조 : 축구의 성공 비결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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